좋은 도구는 거꾸로 만들어진다

광고를 만들고 프레젠테이션만 하던 제가 AI 도구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다음 중 하나였습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만들겠다는 거냐? 만들어서 뭐하려고? 사람이 하고 있잖아?

저는 개발자도, AI 전문가도 아니기에 아는 건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신은 있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광고 현업 종사자가 광고 현장에서 해오던 일(경쟁 PT 제안서 앞단 작성)을 AI가 대신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신기술은 아니지만, 한번 만들어놓으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품을 먼저 만들지 않는다

만들면서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인데, 제가 삽질을 거듭한 이 방식에는 이미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건 팔란티어로 인해 유명해진 'FDE(Forward Deployed Engineer)'였습니다. a16z와의 대담 영상에서 팔란티어의 한 수석 아키텍트는 이 방식을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 완성된 제품이 없다는 전제에서, 반드시 만들어내야 할 결과 하나에 급진적으로 집중하고, 거기서부터 거꾸로 제품을 만들어간다.

제품을 먼저 만들고 시장에 진입하는 게 일반적인데, 이 방식은 현장에 먼저 들어가서 그 현장이 반드시 만들어내야 하는 결과 하나에 몰두하고, 그 결과가 나오도록 도구를 거꾸로 조립합니다.

FDE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

저는 이 영상을 보면서 FDE는 특정한 직군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는 일하는 방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FDE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에 가까운 개념이라는 생각입니다.

이제서야 조금 알게 됐지만, 작년 12월 시작할 때만 해도 FDE는 물론이고 아무 것도 몰랐던 저는 그냥 만들 수 있고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저에게 현장은 27년을 보낸 광고 현업 그 자체였고, 디렉터의 위치에서 만들어내야 할 단 하나의 결과물은 경쟁 프레젠테이션에 들어갈 전략 방향이었습니다. 결과물 완성본은 가상으로 상정한 다음, 거기서부터 거꾸로 시작했습니다.

그냥 다 하는 것만이 방법

등산은 하산길이 더 위험하다고 하듯, 일을 거꾸로 하는 건 지난한 과정이었습니다.

어떤 결과물이 나와야 하는지는 머릿속에 선명한데, 그게 AI에서 나오도록 하는 일은 차원이 전혀 달랐습니다. AI 특유의 말투는 기본이고, 황당한 단어 사용, 논리 구성에서 나타나는 각종 허점까지, 사방이 문제 투성이였습니다. 4개월 쯤 지났을 무렵에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린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해결 방법은 단순 무식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뭐는 되고, 뭐는 안되고,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이렇게 하는 것보다 저렇게 하는 게 낫다. 쉼표의 위치부터 접속사의 활용례까지 규칙으로 만들고, AI가 그 규칙을 따르도록 강제했습니다.

고통의 산물

팔란티어 사람들이 이 방식을 두고 하는 말이 몇 개 있습니다.

> absorb pain, excrete product.

> pain is a moat.

저도 지나고 보니 수긍하게 됩니다. 매번 새로운 문제에 부딪히고, 그걸 해결하기 위한 과정과 방법론이 결국 도구의 내용이 됩니다. 그 과정 없이 만들어진 도구는 스펙만 비슷할 뿐입니다.

거꾸로 만들어진 도구

25년 넘게 광고 현장에 있으면서 쌓인 건 대단한 성공 스토리가 아닙니다. 진짜 자산은 흔히 말하는 '암묵지'입니다. 된 것. 안된 것. 다시 봐도 뛰어난 것. 이제 보니 그저 그런 것. 안됐지만 잘한 것. 됐지만 쓰레기 같은 것이 무엇인지 머릿속에 축적되어 있었습니다. 이걸 어떻게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휴리스틱으로 구조화할 것인지가 관건이었는데, 1백여 개의 자료 그리고 최초의 발상에 모티프가 된 책 십여 권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FDE도 아니고 FDE가 될 수도 없지만, 이제 와서 보니 AI AE Synapsis를 그 방식으로 만들었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도구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AI AE는 어떻게 작동하는가에서 다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