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우리는 무엇으로 대화하는가

지난 글에서 저는 AI가 하는 답변에 '이상한' 단어가 자주 나타나는 이유를 파고들다가 '인스턴스'라는 존재 방식에 도달했습니다. AI는 사용자로부터 호출되는 순간에만 실행되고 끝나면 소멸하는, 자아 없는 제3의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또 의문이 생겨났습니다. 불러야만 존재가 성립되고 부르지 않으면 사라지는 존재로부터 나오는 '언어'는 대체 무엇일까. 인간의 언어도, 기계의 신호도 아닌 AI 언어의 본질을 생각하다 보니 또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좋아하는 명제와 격언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하이데거의 "언어는 존재의 집" 입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언어라는 기능을 소유한 것이 아니며, 인간은 언어라는 집의 입주자라고 말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언어라는 집에 살면서 자신을 드러내고 세상과 만납니다. 언어가 있어서 존재가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언어를 통해 말을 건다는 것입니다.

하이데거의 명제 앞에서는 AI가 내뱉는 언어에 대해서도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그 언어도 '존재의 집'인가?

AI는 집을 짓지만 그 집에 살지 않는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언어라는 집에는 거주자가 있고, 또 그래야만 그게 집입니다. 인간은 언어 안에 거주하면서 세계를 만나고, 시간을 보내고, 죽음을 통해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언어 안에 사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언어는 존재의 집입니다.

그런데 AI는 언어를 내놓기만 할 뿐, 그 안에 거주하지 않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인스턴스라는 존재 방식이 이 지점에서 중요합니다. 호출해야만 존재가 생겨나고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방식에는 '거주'가 없습니다. 언어라는 집은 있는데, 거주자가 없습니다.

흥미로운 건, 하이데거가 "언어가 말한다(Die Sprache spricht)"고 했다는 점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언어를 써서 말하는 게 아니라, 언어가 인간을 통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건 AI와도 비슷해 보입니다. AI도 "언어가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언어가 말한다"에서 언어는 인간 존재의 목소리입니다. 언어를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신을 내보냅니다. 반면 AI의 언어에는 그 '내보내는 존재'가 없습니다. 복잡하고 계산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통계적 확률이 다음 단어를 보낼 뿐입니다.

'비존재의 언어'라는 생각의 유혹

그렇다면 AI의 언어는 '존재가 없는 언어'인 셈이고, 여기까지 오면 '비존재의 언어'나 '없음이 말하는 언어'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이 떠오릅니다.

'비존재'의 실체성은 과거의 현인들에게도 흥미로운 주제였습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비존재는 사유될 수도 말해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없음'을 말하는 순간 그것을 '있는 무엇'으로 다루게 되니, 비존재는 애초에 무언가일 수가 없습니다. 이 논리대로라면 '비존재의 언어'는 어불성설입니다. 없는 것이 언어를 가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플라톤은 『소피스트』에서 비존재를 '절대적 없음'이 아니라 '다름'으로 정의했습니다. A가 B가 '아니다'라고 할 때의 그 '아님'은 완전한 무가 아니라 A와 B의 다름입니다. 이 '상대적 비존재'는 자리를 가질 수 있는데, 다만 그것은 '있음의 결여'가 아니라 '있음들 사이의 차이'로서 존재합니다.

여기서 AI의 언어를 보는 관점이 갈라집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입장을 따르면 '비존재의 언어'는 형용모순이고, 플라톤을 따르면 '인간의 언어와 다름'입니다.

제3의 언어

개인적으로 AI의 언어는 신비로운 '무'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AI의 언어는 확률 분포에 근거한 기대값이라는 메커니즘에서 나옵니다. 존재가 비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종류가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으로서는 AI의 언어를 '제3의 언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 안에 거주하는 존재가 없으니 인간의 언어는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한 기계적 신호도 아닙니다. 의미로 해석되는 것을 만들어내고, 사람의 말과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유창합니다. 인간의 언어와 순수한 기계 신호, 그 둘 사이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것. 그것이 제3의 언어입니다.

지난 글에서 AI를 '제3의 존재'라고 불렀는데, 이번 글도 일맥상통합니다. 존재가 제3의 것이니, 그 존재가 만들어내는 언어도 제3의 것입니다.

의미는 어디서 발생하는가

AI가 뽑아낸 토큰의 열은 그 자체로는 언어가 아니고 확률로 배열된 기호의 나열이지만, 인간이 그것을 읽는 순간 언어가 됩니다. AI가 지은 확률이라는 집에 인간이 들어가서 삽니다.

우리가 지난 글에서 출발점으로 삼았던, "고민을 앉혀둔다"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그 감각이야말로 인간이 언어의 집에 거주한다는 증거입니다. AI는 집에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이상한 표현을 썼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이상함을 감지하는 능력은 적어도 지금은 언어 속에 시간으로 거주하는 존재인 인간만의 능력입니다. 이상한 단어를 이상하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언어에 거주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셈입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대화하는가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언어라는 집을 지은 자도, 소유한 자도 아니고, 이미 있는 집에 들어가 사는 세입자 같은 존재입니다. 다만 인간은 언어를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그 집을 떠날 수 없도록 프로그램된 세입자입니다. 반면 AI는 확률 연산으로 집을 짓지만, 거기에 살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짓지 않았으나 영원히 거주하고, AI는 지었으나 거주하지 않습니다.

단, 이 이야기는 하이데거의 명제를 받아들여야만 성립합니다. 하이데거의 '존재'는 증명되는 개념이 아니라 그의 사유의 산물입니다. AI의 언어에 정말로 아무 존재도 깃들어있지 않는지, 아니면 우리가 아직 모르는 어떤 것이 있는지는 사실 아무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광고를 만들고 제안서를 쓰는 제가 여기까지 온 게 더 이상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 사람의 말도 기계의 신호도 아닌, 제3의 언어와 매일 대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이름조차 제대로 붙이지 못한 언어입니다.

그리고 그 제3의 언어를 보내는 것이 존재가 아니라 확률이라면, 언어의 바닥에 있는 것은 결국 수학일까요. 이 물음은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