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 시인 vs 유세객
AI에게 어떤 주제를 주고 시나 소설을 써달라고 하면 곧잘 쓰는데, 클라이언트나 심사위원을 설득할 경쟁 PT 제안서는 잘 쓰지 못합니다.
저는 그 이유가 '규율'의 유무에 있다고 봅니다. 시와 소설은 자유로운 창작이라 지켜야 할 규칙이 느슨하고, 그래서 어떻게 써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 반면 설득이 목적인 글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분명히 있고, 그걸 어길수록 설득력이 약해집니다.
경쟁 PT 제안서의 진짜 어려움
경쟁 PT 제안서는 이야기가 전략적으로 들리게 쓰거나, 전략을 이야기처럼 풀어서 써야 합니다. 조근조근 하는 듯한 이야기에 전략이 들어가거나, 자칫 딱딱한 전략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로 풀어내야 합니다. 이야기만 있으면 "흥미롭긴 한데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거냐"가 되고, 전략만 있으면 "틀린 말은 없는데 마음이 가지 않는다"가 됩니다.
춘추전국시대에 소진, 장의, 범저 같은 이들이 전략가로 불린 것은 바로 이 둘을 적재적소에 구사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왕 앞에서 천하의 형세를 논하는 전략가이면서, 동시에 그 전략을 왕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로 풀어내는 유세객이었습니다. 그들의 혀 끝에 잉크를 바르고 글을 쓰게 한다면, 아마도 가장 완벽한 제안서가 될 것입니다.
실제로 경쟁 PT 제안서를 이렇게 쓰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25년 넘게 광고 현장에 있으면서도, 이야기로 전략을 구사하는 제안서를 본 적은 손에 꼽습니다.
AI에게 시켜보기
흔치는 않지만 가끔 사람도 경쟁 PT 제안서를 잘 쓰니까, 저는 AI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기회를 주기로 했습니다. 완벽한 건 없고 완벽할 수도 없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할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초기의 결과는 솔직히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AI는 슬라이드를 한 장씩은 꾸역꾸역 만들어냈지만, 전체를 놓고 보면 앞뒤가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단어와 어색한 표현이 멋대로 튀어나왔고, 근거 없는 이야기를 지어냈으며, 비약은 늘상 나타났습니다. 설득에 필요한 구조를 갖추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규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두운, 3인칭, 액자 소설 등 최소한의 바운더리만 명시하면 되는 시나 소설과 달리, 제안서는 고려해야 할 사항이 너무 많았습니다.
규율 강제
결론적으로 시스템 프롬프트를 수십 번 갈아엎었습니다.
해도 되는 것,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 반드시 해야 하는 것,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 이 네 가지를 마치 한국인에게 영문법을 가르치듯 일일이 시스템 프롬프트에 우겨넣었습니다. 시스템 프롬프트가 왜 AI 결과물의 품질을 좌우하는지는 AI를 광고 전략 설계 도구로 만드는 방법에서 따로 다뤘습니다. 경쟁 PT 제안서라는 '장르'가 지켜야 할 규율을 하나하나 프롬프트화하여 AI에게 주입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 AE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는 Synapsis가 만들어졌습니다. Synapsis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AI AE는 어떻게 작동하는가에서 다뤘습니다. AI가 시와 소설은 사람처럼 잘 쓰는데 제안서는 못 쓴다면, 그것은 AI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AI가 따를 규율이 없기 때문입니다.